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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이전 활동기록/***성문화

[분홍이의 세상읽기] 생리결석을 주장하며!


'생리결석', 내 몸에 대한 배려를 위해...


참으로 신기하다. 강산이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을 테고, 세상이 뒤집어 졌어도 수천 번을 들썩였을 텐데, 난 고대에 회자되었던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냥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다.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소녀가 생리중일 때에는 변두리 허름한 창고에 가두어놓고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거나, 생리하는 여성을 만지면 눈이 먼다고 믿었다거나 하는 이야기. 여성의 자궁이랍시고 남성의 페니스를 몸 안으로 똑같이 그려놓은 아주 무식한 해부도, 여성의 성기를 대신하고 있는 검은 해골 그림, 성욕이 정상적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자궁이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부인병을 야기한다고 믿었다는 이야기. 불경스럽고 더러운 여성의 몸, 여성의 피, 여성의 성기에 관한 이야기는 어쩜 이다지도 변화가 없는지...

내가 처음으로 생리를 시작한 날이 생각난다. 엄청 놀랐거나 무서웠거나 아니면 정말 기뻤다거나, 뭐 이런 느낌은 없었다. 어른들의 말처럼 비로소 ‘여자’가 된 것에 감동했다거나,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감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던 것도 아니다. 단지 팬티에 묻은 뻘건 흔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을 뿐이다. 화장실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날 발견하고 과장된 축하인사를 던지는 엄마의 반응이, 쑥스러웠을 뿐이다. 그 변화는 조금은 번거롭지만,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상 속의 작은 변화였을 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불편함이 되고, 수치스러운 것이 되고, 공포가 되어버렸다. 꿉꿉하고 질척이고 끈적이는 불쾌함은 그렇다 치고, 행여나 바지에 묻진 않을까, 행여나 또래 남자아이들이 나의 비밀을 눈치 채진 않을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옷매무새를 뒤돌아보곤 했다. 가슴이 나오고 생리를 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은 아닐 진데, 왜 그 때 난 그렇게도 자라나는 나의 몸이 싫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몸을 통해 드러나는 차이가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왜 그렇게도 대단한 놀림꺼리가 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조금 들면서 그 불편함과 수치스러움은 모양새를 바꾸었다. 숙달된 인내심으로 거동의 불편함이나 뒤처리의 번거로움은 해결할 수 있었지만, 어느새 ‘피’ 흘리는 나의 ‘여성으로서의 몸’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여성의 몸이 성폭력과 연결된다는 것을, 생리가 임신과 연결된다는 것을 ‘배우면서’부터였다. 그래서인지 점점 더 내 몸의 변화는 비밀이 되어갔다. 아니, 비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불경스런 무언가가 되어갔다.

생리에 관한 이야기들 대부분이 이딴 식이다. 임신, 질병, 더러움, 번거로움... 지난 3월부터 전교조가 제기해온 여학생들의 생리결석권에 대해 교육부가 인정불가를 외치며 내건 이유, 즉 “생리통은 의학계에서도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교육부는 역설적이게도 정기적으로 꼬박꼬박 생리하는 ‘건강한’ 여성들을 ‘환자’로 만들어버렸다. 근데 좀 이상타. 언제는 ‘모성보호’를 한답시고 성인여성에게 생리휴가를 주더니만, 왜 여학생들의 생리권에 대해서는 질병 운운하며 거품을 무는 걸까. 결국 여성의 생리는 ‘모성’ 혹은 ‘임신’과 관련해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은 아닐까?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여학생은 아직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학생은 ‘여성’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여학생은 단지 ‘학생’일 뿐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여학생의 ‘생리결석권’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녀가 어머니가 될 존재이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병마’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녀가 혹은 내가 자신의 몸에 귀를 기울이고, 몸이 원하는 편안함을 배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몸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 아기를 낳을 자궁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난 언제나 여성이었지만 제대로 여성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거추장스런’ 몸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몸이었음 좋겠다. ‘침묵하는’ 몸이 아니라, ‘말하는 혹은 주장하는’ 몸이었음 좋겠다.